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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모비딕(1850/2019 문학동네)

sealover 2020. 12. 16. 14:15

누구나 다 알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드물다는… 고전의 정의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책.

어린 시절 읽었던 모비딕 Moby-Dick은 에이해브 Ahab 선장의 광기와 그가 흰 고래에게 작살을 겨누는 모습을 굵은 흑백의 선으로 표현한 삽화로 각인되어 있다.

언젠가부터 모비딕은 미뤄둔 숙제처럼 내 뒤를 따라다녔다. 몇 번이나 책을 들었지만 강렬한 첫 문장과 달리 이후 이어지는 난해하고 지루한 서술들과 책의 두께 때문에 슬며시 놓고 말았다.

굳이 재미없는 책을 억지로 읽을 필요는 없다는 태도 변화와 직접 읽지 않고 얻은 지식들로 모비딕과 향고래잡이 Yankee Whaling에 대해서 알만큼 안다는 이상한 자신감으로 인해 굳이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모비딕을 재미있게 읽고 ‘흰 고래 모비딕’을 동경하게 되었다는 친구 이야기를 듣고, 과연 이 책에는 어떤 재미 또는 매력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 책을 들었다.

예전에 포경선을 타셨던 분들을 비롯해서 고래를 좀 안다면서, 고래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자기 스토리에 허풍 또는 허세 양념을 많이 치시는 경향이 있다. 이 서술에 대한 증거는 없지만, 멜빌 Herman Melville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가 최초의 고래잡이라는 82장이 가장 압권이다. 고래의 크기를 이야기하는 103장도 만만치 않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이 밝혀진 사실들 때문에 모두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고, 특히 고래를 아무리 잡아도 절멸에 이르지 않을거라는 105장은 절대 믿으면 안된다. 하지만 멜빌은 고래와 고래잡이에 대해서 만큼은 거품 쫙 빼고 엄청나게 정확한 사실적 묘사를 한다. 그렇지만 아는체와 허세가 책 전체에 넘친다. 툭툭 튀어나오는 고유 명사들과 성경 등의 문장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다면 읽어 내기가 고통스럽다.

아주 사실적으로 설명하듯이 써 내려간 선박, 바다, 고래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사실’이라서 읽기가 쉽지 않다. 이래저래 만만한 책이 아니다.

의외로 줄거리는 단순하다. 두 줄 정도면 요약 가능하다.

고래 잡다가 그 고래한테 다리 다친 선장이
복수를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죽는다.

하지만 3 - 4년간 이어지는 향고래잡이 항해의 전체 여정과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다른 선박들과의 만남이라는 방법으로 소개한다. 여기에 고래잡이와 그에 따른 선상 생활에 대해서도 일일이 세부 내용을 설명하고, 향고래의 생물과 생태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알려준다.

고래잡이 자체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분량이 만만치 않은데. 에이해브의 복수라는 여정을 같이 엮어내고 있어서 책이 무지막지하게 두껍다.

향고래와 고래잡이에 대한 서술들이 너무 정확해서 그런 부분들은 원서로 다시 읽고 싶다(32, 55, 56, 74, 75, 76, 80장). 고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그 부분들만 읽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포경선 에식스 Essex호의 이야기가 모비딕의 모티프가 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에식스호 이야기에 에이해브와 흰 고래의 대결을 짜맞춘 플롯이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화자가 바뀌는 것도 어색하다. 원래 소설이 다 그렇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향고래의 몸에 생기는 흰 상처는 빛의 산란 때문에 물 속에서 실제보다 더 확대되어 보이기 때문에, 수컷 향고래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희게 보인다. 이야기 속 모비딕은 진짜 온 몸이 하얀 고래라기보다는 이렇게 생긴 상처와 경험이 많은 노련한 수컷을 상징하는 것 같다. 멜빌은 흰 동물이 주는 신비와 공포에 대해서 따로 한 장(42장)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모비딕을 때로는 한 개체로 때로는 고래 전체를 상징하는 대상으로 다루면서 거대함과 신성함(물론 악마의 것이긴 하지만…)을 지닌 초월적 존재처럼 반복해서 서술하고 있다. 이미 고래에 대해서 가진 뚜렷한 이미지가 없다면, 멜빌의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모비딕 또는 고래에 대한 경외감? 같은 게 생길 수밖에 없다. 내 친구도 그랬나 보다.

고래 잡고, 끌어오고, 해체하고, 기름 뽑고, 갑판 정리하고, 자기 몸 씻고, 한숨 돌리면, 돛대 위에서 들려오는 ‘고래 발견’ 외침에 또다시 고된 고래잡이 일상이 시작된다는 이야기(98장)처럼 반복되는 일상,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이를 피타고라스, 인도의 신들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동양철학과 윤회에 대한 멜빌의 인생관이라고 평한 글을 봤다. 멜빌이 포경선 타다가 도망쳤다는데, 어지간히 힘들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그런 부분들 읽으며 그냥 피식 웃었다.

모든 인생이 이런저런 반복의 연속이지만, 배에 타고 있으면 공간이 주는 한계 때문에 그러한 변화없는 반복이 정말 사람 미치게 만든다. 상선은 그나마 배도 크고 반복 시간도 이 항구에서 저 항구까지로 그나마 길다. 포경선도 마찬가지지만 어선에 타면 배도 작고 24시간 또는 그보다 더 짧은 주기로 투망, 양망, 잡은 고기 정리가 반복된다. 저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멜빌이 배를 타고 느꼈던 그 감정들이 느껴진다. ㅋ

책에 대한 정보를 탐색하는 자세로 읽다보니 작가가 전해주는 현실과 천상을 오가는 영적 체험은 못했을 수 있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얇은 지식들로 인해 두께가 만든 선입견에 비해서는 꽤 재미있게 읽었다.

몇 번 더 읽을 것 같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OpenClipart-Vectors님의 이미지 입니다.

'황유원' 시인이 번역한 '문학동네' 책을 읽었다. 바다와 고래가 생소하다면 '김석희'가 번역한 '작가정신' 책을 추천한다. 읽어보지 않았지만 배 구조나 고래에 대한 설명 그림이 자세하고 많아서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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