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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시계공 (The Blind Watchmaker, 1986) 본문

책을 읽자!

눈먼 시계공 (The Blind Watchmaker, 1986)

sealover 2009. 2. 18. 14:07
이 책은 리처드 도킨스가 진화론을 옹호하기 위해서, 다윈의 자연선택을 사람들에게 보다 잘 전달하기 위해서 쓴 책이다.

감상은 "잘 봤다."고.....
한국에서는 공교육에서 진화론을 가르친다. 학교에서 성적을 잘 받거나 대학을 가기 위한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려면 진화론이 정답이라고 써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공교육에서 잘못 가르친 수 많은 부분(특히 근, 현대사 등 사회 과학 분야)에 대해서 분노하면서도 자연과학 쪽은 거짓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진화론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라왔다. 남들도 그런줄 알았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웃기는 사실은 나도 학교에서 배운 사실을 많이 버렸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진화론을 버리고 창조론을 택하는 사람이 늘어 간다는 사실이다. 

이 책이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읽으려고 하지 않을테니.......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궁금한게 많은 사람이라면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상당히 잘 쓰여진 책이다. 읽기가 쉽지는 않다.

아래는 책에서 발췌한 부분인데 내가 두고 두고 볼려고 써놨다. 
난 "이용철"이 옮긴 "(주)사이언스북스"에서 발간한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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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 - 379쪽
피셔는 도약설이 오늘날보다는 훨씬 유행하고 있던 시대에 모든 형태의 도약설에 대해 강한 신념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사용했다. 초점이 거의 맞지만 완전하지는 않은 현미경이 있다고 가정하자. 더군다나 현미경은 초점 조절 이외의 방법으로는 정확한 상(像)을 얻을 수 없다. 만약 이 현미경의 상태를 터무니없게 변화시켰을 때 (이것은 돌연변이에 해당한다.) 초점이 맞아 올바른 상의 질이 전반적으로 향상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피셔는 그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어떤 식으로든 큰 폭의 조정이 이루어질 경우에는 상(像)의 질이 향상될 가능성이 극히 작지만, 현미경 제작자나 사용자가 의도한 최소의 조정 폭보다 미세한 조정이 이루어질 경우 개선될 확률은 거의 정확하게 2분의 1임은 거의 확실하다.

피셔가 “쉽게 알 수 있다.” 라고 생각한 것이 일반 과학자로서는 획득하기 어려운 지력을 요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지만, 위의 인용문에서 피셔가 “거의 확실하다.” 라고 말한 데에도 마찬가지 사실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가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경우에는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도 만족스럽게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조정을 가하기 전의 현미경이 초점이 거의 맞추어져 있는 상태라는 가정에 대해 잘 생각해 보자. 렌즈가 완전히 초점이 맞는 위치보다 조금 낮은 위치, 가령 10분의1센티미터 정도 슬라이드 글라스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고 하자. 그런데 아주 미세하게, 가령 100분의 1센티미터 임의적으로 렌즈를 움직인다면 초점이 앞의 경우보다 나아질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만약 아래쪽으로 100분의 1센티미터 움직였다면 초점은 더 어긋날 것이다. 또한 만약 위쪽으로 100분의 1센티미터 이동했다면 초점은 앞의 경우보다 나아졌을 것이다. 렌즈를 움직이는 방향은 임의적이므로 이러한 두가지 경우 중 어느 한쪽이 일어날 확률은 2분의 1이다. 조정을 위한 렌즈의 움직임이 최초의 오차에 비해 작으면 작을수록 초점이 향상될 확률은 2분의 1에 가까워질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피셔의 명제의 후반부는 완전히 입증된다.

...중략...

그러면 피셔는 왜 현미경의 초점이 처음부터 거의 맞추어져 있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했을까? 이 가정은 현미경이 비유에서 맡은 역할에서 비롯된다. 임의적 조정을 거친 후의 현미경은 돌연변이를 일으킨 동물을 나타낸다. 또한 임의의 조정을 거치기 전의 현미경은 돌연변이를 일으킨 동물의 돌연변이를 일으키지 않은 정상적인 부모를 나타낸다. 부모의 경우에는 분명 번식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살았을 테고 따라서 분명 훌륭한 조정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임의적인 상하 움직임을 거친 앞의 현미경의 초점이 전혀 맞지 않는 경우란 상상할 수 없고 비유로 표현되고 있는 동물이 완전히 생존할 수 없는 경우도 불가능하다. 이것은 비유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혀 맞지 않은’ 크기가 1센티미터든 10분의 1센티미터든 또는 100분의 1센티미터든, 우리의 논의에서는 하등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점차 그 정도가 커지는 돌연변이를 생각하고 있다면 돌연변이가 커짐에 따라 점점 이익이 적어지는 점에 도달하며, 반대로 계속 그 크기가 감소하는 돌연변이를 생각하고 있다면 점차 돌연변이가 유리해질 수 있는 확률이 50퍼센트가 되는 점에 도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502 - 503쪽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돌연변이를 ‘무작위적’ 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돌연변이가 무작위적이지 않은 세 가지 측면, 즉 돌연변이는 X선 등으로 유발된다. 돌연변이율은 유전자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전진 돌연변이율은 복귀 돌연변이율과 반드시 균형을 이룰 필요는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 돌연변이가 무작위적이지 않은 네 번째 측면을 덧붙여야 한다. 돌연변이는 ‘이미 존재하는’ 배아 발생 과정에 변화를 더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의미에서 무작위적이지 않다. 아무리 자연선택에 유리한 변화라 할지라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이루어진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자연선택에 따라 가능한 변이는 실제 이미 존재하는 배아 발생의 과정을 통해 제약을 받는다.
돌연변이가 무작위적이지 ‘않았을’ 것임을 알려 주는 다섯 번째 측면이 있다. 동물의 생활에 대한 적응성을 개선시키는 방향으로만 체계적으로 편향되어 있는 돌연변이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상상은 가능할지 몰라도, 이러한 편향이 어떤 수단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는지 분명하게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정한 다윈주의자가 돌연변이란 무작위적이라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 다섯 번째 측면, 즉 ‘돌연변이론자’의 관점에 대해서뿐이다. 돌연변이는 적응적 개선의 방향으로 체계적으로 편향되어 있지 않으며, 이 다섯 번째 의미에서 무작위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돌연변이를 유도하는 어떤 메커니즘도 (온건하게 표현하자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돌연변이는 다른 모든 측면에 대해서는 무작위적이지 않지만 적응적 유리함이라는 측면에 대해서만 무작위적인 셈이다. 진화를 유리함이라는 측면에서 무작위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힘은 선택, 오직 자연선택뿐이다. 사실 돌연변이설은 틀렸을 뿐 아니라 결코 옳을 수도 없다. 그 이론은 근본적인 원리에서 진화가 가져오는 개선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돌연변이설은 어떤 의미에서도 다윈주의를 반증한 경쟁 이론이 아니며, 경쟁 이론이 될 자격조차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돌연변이설은 라마르크주의와 같은 선에 놓을 수 있다.

514 - 516쪽
그러면 문제 전체의 결론에 귀를 기울이자. 생명의 본질은 거대한 척도에서 볼 때 통계적인 불가능성에 있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모든 설명은 우연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존재에 대한 진정한 설명은 분명 우연에 대한 반명제(反命題)를 구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연에 대한 반명제는 무작위적이지 않은 생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무작위적이지 않은 생존은 우연의 반명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우연이 될 것이다. 이러한 양극을 연결하는, 즉 1단계 선택에서 누적적인 자연선택에 이르는 연속체가 있다. 1단계 선택이란 순수한 우연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바로 이것이 내가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무작위적이지 않은 생존이라는 것이다. 느리고 점진적인 ‘누적적인 자연선택’ 이야말로 생명이 가지는 복잡한 설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으며, 더욱이 지금까지 제안된 이론들 중에서 유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설명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연이라는 개념, 즉 질서나 복잡성이나 명쾌한 설계가 자연 발생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주 작은 가능성밖에 두지 않았다. 우리는 우연을 길들이는 방법, 그 날카로운 송곳니를 뽑는 방법을 찾아 왔다. ‘야생의 우연’, 순수하고 벌거벗은 우연성이란 질서 있는 설계가 무(無)의 상태에서 실재(實在)로 단숨에 뛰어넘는 것을 뜻한다. 원래 눈이 없었지만 겨우 한 세대 동안 눈 깜짝할 사이에 눈이 발생했다면, 그것도 모두 완전무결한 형태로 눈이 발생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우연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 확률은 시간의 종말의 이르기까지 소수점 이하에 0을 그려 넣어야 할 만큼 희박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무결한 무엇이(그 속에는 어쩔 수 없이 신성도 포함될 것이다.) 자연 발생적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서도 같은 확률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연을 ‘길들인다’ 는 말은 바꾸어 말하자면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일을 그보다는 가능성이 덜 희박한 작은 구성 요소로 잘게 나누어 잘 배열하는 것을 뜻한다. 가령 X가 단하나의 단계를 거쳐 Y에서 발생하기는 불가능하더라도 둘 사이를 무한소(無限小)로 분할할 수 있는 연속된 중간물을 통해 X와 Y를 연결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대규모적인 변화는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작은 변화는 그것보다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충분히 세분된 연속적인 중간형으로 이루어진 충분히 큰 계열을 전제한다면 천문학적인 불가능을 피해 어떤 것에서 다른 무엇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중간형을 끼워 넣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우리는 분명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특정한 방향에 따라 매 단계를 인도하는 메커니즘이 있는 경우에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그렇지 않으면 각 단계의 계열은 폭주를 시작하고 끝없는 무작위적인 방황을 계속할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단서를 모두 만족시키는 느리고 점진적인 누적적 자연선택이야말로 우리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이라는 것이 다윈주의에 토대를 둔 세계관의 주장이다. 느린 속도의 점진설을 부정하고 자연선택의 중심적인 역할을 부정하는 진화론의 이설(異說)이 있다면 그런 변종들은 특정한 경우에는 사실일 수 있지만, 결코 완전한 진실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이설들이 진화론의 핵심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핵심이란 천문학적인 불가능성을 해소하고 믿을 수 없고 기적처럼 보이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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